[한기호의 만화 평론] 잠에서 깨어날 때 - 추억의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회상하며

한기호 문학박사l승인2019.02.25l수정2019.02.2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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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는 숲속의 공주 (Sleeping Beauty, 1959)

이 세상은 수많은 선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가로와 세로, 엑스와 와이 축, 위도와 경도, 본초 자오선이나 날짜변경선 등을 비롯해서 수없이 많은 선들이 땅을 나누고 구분한다. 보이지 않는 실들이 촘촘하게 치밀하게 짜인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여성 신들은 실을 잣거나 베를 짜는 일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땅을 주관하는 것이 ‘지모신’, 땅이 곧 ‘가이아’이기 때문에 땅의 질서를 변별하는 일은 여성이 실을 잣거나 옷감을 만드는 일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늘에 사는 견우의 짝이 굳이 베 짜는 여인 ‘직녀’인 이유가 그러한 까닭이며, 갑자기 사라져버린 신라의 햇빛을 되돌리기 위해 연오랑의 아내 ‘세오녀’가 자신이 짠 비단을 제물로 드린 이유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동일한 이유 때문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주인공 ‘오로라’는 베를 짜는 기구인 물레의 바늘에 찔려 죽는다는 저주를 받는다. 고상한 삶을 살아가는 공주가 하찮은 노동의 도구인 물레를 돌릴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신화의 구조와 상징을 답습하게 마련이다. 어린 여자아이가 성숙한 여성으로 변화하는 나이가 되면 그는 스스로 세상의 질서를 자아내는 존재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을 구획하는 경계와 질서의 상징인 실을 뽑아내는 물레와 친밀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오로라가 굳이 물레 바늘에 찔려 죽는다는 저주를 받는 이유이다. 물론 이 끔찍한 저주는 요정의 도움을 받아 깊은 잠에 빠지는 것으로 대체된다.

마녀의 계교에 빠진 오로라는 물레 바늘에 찔려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진다. 그리고 매우 당연하게도 그 저주를 푸는 열쇠는 사랑하는 남자의 달콤한 키스이다. 원작이 말하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와서 속성으로 재배된 가시덤불 숲으로 전환된다. 마법으로 자라난 고난의 가시덤불 숲을 헤치고 불을 뿜는 거대한 용과 싸워 이긴 필립 왕자가 오로라에게 키스를 하면 온 세상은 마법으로 깨어나 새로운 삶을 이어가게 된다. 1959년에 제작된 디즈니 작품의 놀라운 완성도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충분히 경이롭다.

사실은 매우 단순한 구조의 이 이야기를 의학적 배경을 첨가한 고도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깊은 숲속에 갇혀 잠에 빠져있는 공주는 아직 자신에게 맞는 정자를 만나지 못해 수정되기만을 기다리는 외로운 난자를 상징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1회 사정에 무려 2억이 넘게 방출되는 정자는 어마어마한 경쟁과 험난한 여정을 거쳐서 가까스로 난자에 도달하게 되어있다. 정자가 분출되고 수정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은 필립 왕자가 불을 뿜어내는 용과 대결하듯 뜨거운 전투로 묘사할 수 있는 격렬한 사랑의 행위를 연상하게 한다. 인류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이러한 사투를 겪으며 가까스로 사랑을 이루어 자신들의 유전자를 계승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격전의 과정이 인간의 DNA에 내재되어 잠재적으로 유전되고 그것은 다시 이야기의 형태로 변형되어 각 민족들의 문화에 맞는 옷을 갈아입고 대대로 전승되는 법이다. 그렇게 오로라가 물레에 찔린다는 것은 당연히 그가 겪게 될 성적인 경험의 감각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이것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의 변형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우리의 주인공 오로라는 어린아이의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나 온전한 성인이 되기 위해 통과의례를 치르기 위한 입회자이다. 물레에 찔리도록 마녀가 저주한 시기가 굳이 생리적으로 잉태와 출산이 가능한 나이에 설정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립할 수 없는 어린아이가 독자적으로 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할 수 있는 성인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질서를 변별하는 실을 자아내는 역량을 갖추어야 하며 그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어둡고 외로운 숲속에 갇혀 수행하는 고난의 여정을 겪어야만 하는 법이다. 이미 많은 원시 부족들이 첫 생리를 시작하는 여성들을 숲속에 가두어 고난의 성인식을 치르는 문화를 보유하고 전승하고 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의 문화적 증거이기도 하다.

유럽의 오랜 문화 중에 ‘실 잣는 방’에 관한 것도 있다. 이것은 일종의 살롱이나 거실 문화의 전신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미혼의 여성들이 한 방에 집단으로 모여 실을 자아내는 단체 노동을 한다. 문제는 이곳에서 실만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들은 여성들만의 은밀한 정보를 공유하며 때로는 다양한 방법으로 실행에 옮기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한다. 더구나 미혼의 여성들만이 모여 있는 은밀한 방을 간단히 무시하고 넘어갈 피 끓는 유럽의 젊은 남성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문화적 배경의 은유와 상징의 복합체가 <잠 자는 숲속의 공주>를 탄생하게 만든 원동력이라는 해설도 있다.

이 이야기를 신화적 관점에서 보든, 어떤 특정 지역 문화의 반영으로 보든, 성적인 은유와 상징으로 보든, 아니면 씨앗이 땅에 떨어져 오랜 세월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햇빛과 물과 공기와 더불어 깨어나 왕성하게 자라난다는 식물 탄생의 은유로 보든 해석하는 사람의 자유를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늘 그렇듯이 모든 문화물에 대한 ‘지금 여기’의 관점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리 편치만은 않다.

굳이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으나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갈 공주는 지금 어두운 숲속 외로운 성 안에 갇혀 깨어날 시기를 짐작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진 채 우주의 도움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난 공주가 세상을 새롭게 하길 바라는 것이 온 백성들의 염원일 텐데 불행히도 그럴 기미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오로라 공주가 잠드니 온 세계가 다 함께 잠들었던 것처럼 지금 이 나라 역시 깊은 잠에 빠져있다. 잠들어버린 4대강은 썩어서 물고기가 죽어가고, 세월호는 바다 밑에 가라앉아 1년이 넘도록 인양조차 못하고 있으며, 권력의 단물만 빨아먹으려는 간신배들이 전횡을 일삼고 있는데, 온 국토는 가뭄으로 타들어 가고, 이방에서 건너온 외래종 바이러스까지 나라 전체를 마비시키려 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를 둘러싼 일본, 미국, 중국 등 열강들의 움직임 역시 심상치가 않다. 지난 정권에서도 대통령을 위시하여 온통 병역 미필자들만 권력의 핵심에 득실거리더니 지금도 역시 병역의 의무조차 수행하지 못한 허약한 인물이 얄궂은 이유로 총리가 되려 하고 있고 정권을 견제할 야당은 존재감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이다. 이 시대에 누가 과연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용과 싸워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겠는가?

잠에 빠진 공주를 깨울 왕자도 없고 수풀은 날마다 어둡고 울창해지는데 그 안에 갇힌 백성들의 고통만 가중되고 있으니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아름답게 보일 리가 없다.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은 <Sleeping Beauty>라고 한다. 아름답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훌륭하고 갸륵한 일과 마음씨들이 온통 잠들어 있는 이 나라는 도대체 언제 깨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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