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만화 평론] 리더십 워크북 - <통>

한기호 문학박사l승인2019.02.20l수정2019.02.2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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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 민/백승훈 작가)

왜소한 체격과 소심한 성격 탓에 어려서부터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학교 생활과 군 생활에서 겪은 다양한 종류의 폭력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내 몸 어디에선가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남성 호르몬은 나를 격렬한 격투기 경기나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는 액션 영화의 열성적인 팬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젠 액션 만화의 차례가 온 것일까? 웹툰으로 인기 정상을 달리던 만화가 책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이었다. 네 권으로 이루어진 만화를 단숨에 읽었다.

액션 만화는 영화처럼 실감 나는 결투 장면을 연출하기 힘들다. 아무리 뛰어난 장면을 그린다고 해도 2차원 공간 위에 선과 색으로 그려진 만화가 입체감을 동반한 동영상을 뛰어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전 격투기처럼 브라운관을 깨고 나오는 역한 피비린내와 진한 땀 냄새를 만화책 위에 고스란히 재현한다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는 역동적인 선과 강렬한 색채가 살아있으며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인상과 표정이 종이를 뚫고 나올 듯이 이글거려 이채롭다. 이런 역동성이 인기의 비밀이었던가? 단지 화려한 액션 장면과 굵고 선명한 동작선, 그리고 오래 들여다보기 힘든 명징한 색채, 무엇보다 살아있는 눈빛들. 그런 것이 이 만화의 인기 요인이었을까?

경상도 지역의 오래된 남학교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그 친구들의 거친 입담과 굵고 선명한 동작들은 지금도 내 기억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만이 갖고 있는 색깔이며 움직임이다. 그런데 이 만화에는 그런 것이 없다. 무엇보다 강렬한 경상도 사투리의 대사들은 주인공의 액션을 더 강렬하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만화의 제목이 ‘짱’이 아닌 ‘통’이라면 당연히 맛깔스레 조화를 이루었어야 할 경상도의 입담이 없다는 것, 부산에서 전학을 온 주인공이 철저히 매끄러운 서울말만 쓴다는 것이 주는 어색함이 못내 껄끄럽다.

이야기의 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인공은 하늘이 내린 싸움의 신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합리적 배경 설명이 없다. 별안간 혜성처럼 나타난 신이다. 부산의 ‘통’이라는 주인공이 무슨 일로 서울까지 진출하게 되었는지, 게다가 그 머나먼 거리의 전학을 하게 된 필연적인 사연 따위도 없다. 대부분의 교사들에게 도발적인 눈빛으로 덤비던 주인공이 단지 반장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담이 아닌 평범한 잔소리 몇 마디를 던지는 선생님에게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린다는 설정 역시 조악하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그런 일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사도 아닌 교생이 한 학교를 대표하는 싸움꾼 앞에서 당당하게 손찌검을 한다거나 조직 폭력배의 위협에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대든다는 설정 역시 어색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그 교생이 폭력배 두목의 총에 맞아 죽는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는 어쩌란 말인가. 아무리 만화라고 해도 풍자가 아닌 한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상황 설정은 독자를 낯 뜨겁게 만든다. 단 한 사람의 힘으로 한 학교 전체가, 서울시내 고등학교 전체가, 폭력 집단 전체가 온통 뒤흔들린다는 과도한 설정은 무협지의 황당함을 닮아있어서 더욱 당황스럽다.

이 외에도 숱하게 언급할 수 있는 문제점들은 만화 독자라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는 웹툰으로 오랜 기간 인기 절정을 구가하였다. 이제 그 인기의 저변을 생각해볼 시간이다.

 

- 너 외엔 복종할 수도 없고 너 말고는 이끌 사람도 없다.

주인공 이정우를 ‘통’으로 인정하고 모든 것을 믿고 따르겠다는 동료의 대사이다. 이것은 이정우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매우 오글거리는 대사임에 분명하다. 비록 비문(非文)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이 대사야말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이정우의 매력에 압도된 모든 싸움꾼들의 공통된 심리를 단 한 줄로 표현한 것이 바로 저 대사이기 때문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심이 우러나오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표현이다. 이 대사에 담긴 의미는 다음 두 가지이다.

1. 너 외엔 아무에게도 복종할 수 없다.

2. 너 외엔 아무도 우리를 이끌 수 없다.

하나는 의지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명확한 사실의 표현이다. 첫 번째 문장이 명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문장은 그러한 의지를 가져온 사실의 표현이라 하겠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저 대사 하나가 전달하는 매력이 크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만화를 리더십 워크북으로 승격시키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지금 암담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민생은 도탄에 빠져있고 정치는 한없이 저급해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며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는 참담한 지경에 놓여있다. 국토 전역에 걸친 생태계 파괴와 오염의 수준은 회복의 시기를 보장할 수 없으며 언론은 봉쇄되고 왜곡되어 자유로운 목소리가 명맥을 잇기 어려운 상황이다. 각계 지도층의 비리 사건은 일일이 거론하기가 부끄러워 국가의 체면은 이미 망가져 버린 지 오래인데 이름도 낯선 바이러스마저 창궐하여 민심조차 흉흉한 시절을 건너고 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시대를 극복하고 온 국민을 이끌 리더십은 어디에 있을까.

만화에서 이정우는 상대가 선배든 교사든 조폭이든 심지어 폭력배의 우두머리가 겨누는 총구 앞에서조차 전혀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상대 앞에서도 어떤 상황 앞에서도 당당하다. 우리는 어떤 권력이나 어떤 강력한 외세 앞에서도 당당하게 우리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당당한 지도자를 원한다.

이정우는 돈 앞에서도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자유롭게 쓰라고 조폭으로부터 받은 거금을 흔쾌히 내던진다. 그에게 다가오는 유혹의 결론은 돈으로 결집될 수 있을 텐데 어린 나이에 거기에서 자유롭다는 것 자체가 그를 리더로 만드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는 부패한 권력자가 아니라 돈 앞에서도 언제나 당당한 깨끗한 지도자를 원한다.

그는 모든 싸움에서 항상 앞에 서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뒤로 빠지지 않고 솔선하는 자세, 먼저 싸움판에 뛰어드는 그의 모습에서 동료들은 카리스마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앞장서서 문제의 한복판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지도자를 원한다.

다른 학교와의 싸움이나 조폭들과의 싸움이나 그는 늘 동료들을 배려하고 아끼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을 대신해 죽은 동료를 위해서 무모하게 스스로의 목숨을 거는 주인공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숙연한 마음까지 든다. 우리는 항상 국민을 자신처럼 생각하고 아끼며 따뜻한 인간애가 발휘하는 지도자, 우리처럼 가슴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간적인 지도자를 원한다.

허술한 듯 보이는 만화 <통>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얻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우리 사회는 지금 <통>의 주인공이 가진 유치하지만 순수한 리더십에 목말라 있는 것이다. 너무도 단순해서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 그 온전한 리더십이 간절한 것이다. 나를 온통 사로잡아 강요된 존경심이 아닌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지도자는 진정 만화 <통>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신기루인 것일까?


한기호 문학박사  help@u-jew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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