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만화 평론] 치밀하게 소심하게 - 진심만이 열 수 있는 <향연상자>

한기호 문학박사l승인2019.02.11l수정2019.02.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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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연상자, HUN 작가)

요즘은 만화를 마음 편하게 보기 힘들다. 만화를 포함한 모든 문화물들은 그 사회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만화 보기가 불편하다는 것은 그것이 반영하고 있는 사회가 어떤 불편함을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 현상을 골라 만화의 소재로 삼는 작가의 심리와 또 굳이 그런 소재의 만화를 선택하는 독자의 심리가 만나는 자리이다. 어떤 사회 문제를 만화의 소재로 선택한 작가의 심리적 기저와 그 만화를 읽으며 공감하는 독자의 심리적 기저가 만나서 형성하는 공감대가 크면 클수록 그 소재로서의 사회 현상이나 문제 등은 무게가 큰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한 편의 만화가 있다. 제목만으로는 도저히 내용을 유추하기 어려운 <향연상자>이다. 이 만화의 중심 소재는 학교 폭력으로서의 ‘왕따’와 ‘집단 괴롭힘’이다. 학교 재학 중 급우들로부터 너무 심한 괴롭힘을 당한 피해학생의 형이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괴롭혔던 친구들을 납치하여 컨테이너로 정교하게 만든 거대한 덫 속에 가둔다. 그들을 가둬둔 거대한 컨테이너 장치의 이름이 이 만화의 제목인 ‘향연상자’이다.

학교 폭력 문제는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 고려할 때 매우 심각한 수준임에 분명하다. 다각도의 원인 분석과 다양한 해법 마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완전히 사라질 것인지 여부는 매우 불투명하다. 이런 불신은 인간 사회가 가진 속성 때문이다. 인간들이 사회를 형성하여 살아가는 동안 폭력 문제가 없었던 적이 없다. 자연 만물 가운데 폭력을 일상화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며 인간 사회 역시 그러한 인간의 속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학교 폭력 문제의 원인을 과도한 입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나 청소년 시기의 방황과 갈등의 표출 등으로 설명하면서 그 시기가 지나면 사라질 일시적인 문제인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청소년들이 동일한 시기를 지나고 동일한 스트레스를 경험하면서도 모두가 그것을 동일한 폭력적 방법으로 해소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학교 폭력의 문제를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나 게임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영화 산업의 발달이나 게임의 출현 이전에도 학교 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으며 단지 그 형식과 내용이 다채롭게 진화할 뿐임을 고려한다면 미디어 쪽에만 혐의를 두는 것 역시 올바른 해석이라 보기 어렵다.

다행스럽게도 이 만화는 폭력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거나 해결점을 찾는 일에 골몰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어처구니없는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외롭게 남겨진 피해자의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 작품이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그려졌다는 사실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무방비로 폭력에 노출된 사람이라면 그 원인을 분석하기에 애쓰기보다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화를 읽고 나서 줄곧 작가가 선택한 치유 혹은 극복의 방법이 과연 최선일까 하는 의구심이 앙금처럼 남아 마음이 불편했다. 이 작가가 그렸던 작품인 ‘은밀하게 위대하게’라는 제목을 응용하여 이야기하자면 <향연상자>에는 ‘치밀하게 소심하게’라는 소제목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었다.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가해자들을 대상으로 ‘치밀하게’ 계획한 향연상자. 여러 개의 컨테이너와 각종 소도구들과 날짜에 맞춘 기상 예측과 가해자들의 부모로부터 받아둔 각서와 심지어 완벽한 최면술까지 동원되는 치밀한 계획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피해자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전개하는 잔인한 복수극이 아니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지극히 ‘소심하게’도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죄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짧은 근현대사 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왔다. 그것이 일제강점기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탄압이었든 고도의 정치 행위라 일컫는 전쟁이었든 어느 민족도 쉽사리 경험하고 이겨내기 힘든 폭력의 시대를 살아왔다.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찬탈하고 국민들을 공포 정치로 억압해온 폭력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자신의 집권 야욕을 위해 한 도시와 시민 전체를 참혹하게 유린한 폭력의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역시 불의한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해 힘없는 국민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저지르는 유무형의 폭력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정치권력이 국민들에게 자행하는 폭력, 자본을 독점한 자들이 다수 노동자들에게 자행하는 폭력, 부당한 방법으로 기득권을 얻은 자들이 힘없는 국민들에게 자행하는 폭력 등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학교 폭력은 학교를 졸업하면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희망이라면 붙잡고 버틸 수 있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민으로, 한 사회의 시민으로, 한 조직의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받게 되는 폭력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러니 그 절망감의 규모를 어디에 비할 수 있을 것인가?

폭력 피해자 한 사람을 치유하기 위하여 그렇게 치밀하게 계획한 ‘향연상자’들이 필요한 것이라면 우리 국민 전체가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이 치욕스런 폭력의 치유를 위해 준비해야 할 ‘향연상자’는 얼마나 큰 규모여야 할까? 또 설사 그런 상자가 있다고 한들 그 많은 폭력의 주범들을 한꺼번에 감금할 수나 있을 것인가?

만화를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가 그런 것이었다. ‘치밀하게’ 준비해도 ‘소심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시대정신이 이대로 영영 고착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초조함, 모순적인 사회 체제나 부실하고 터무니없는 자본과 정치권력의 거대한 폭력 앞에 끝까지 저항할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하는 암담함, 쥐라도 먹으라면 먹어야 하는 만화의 피해자처럼 권력의 통제와 억압 아래 힘없는 자들은 끝없이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해야 하는가 하는 비통함, 그런 감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치밀어 올라 편하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치밀하게 준비한 <향연상자>의 피해자가 원한 것은 소심하게도 진심 어린 사과뿐이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응할 수 있고, 보통의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행할 수 있는 수준의 평범한 요구사항이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끝까지 사과를 거부한 채 새로운 향연상자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숨길 수도 없고 쉽사리 바뀔 수도 없는 것이어서 그렇게 타고나 길러진 인성이 며칠 동안의 구속 체험으로 변화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사회에서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자들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소심하게도 단 한 가지뿐인 경우가 많다.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 진심 어린 눈물 한 방울, 진심 어린 반성의 손길 한 번, 멀리 갈 것도 없다. 세월호 유가족들, 탄압받는 노동자들,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국가조차 외면하는 일본군 성노예의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 남북 분단으로 인한 희생자들,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받고 살아가는 이 땅의 수많은 소수자들. 그들은 자신들이 입은 숱한 폭력의 피해에 대해 ‘소심하게’도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나 반성이나 손길 한 번만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한 향연상자가 있다고 한들 ‘진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내용이 우리 사회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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