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만화 평론] 마실 수 없는 추억 또는 현실 - 씁쓸한 <커피 한 잔 할까요?>

한기호 문학박사l승인2019.01.28l수정2019.01.2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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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 한 잔 할까요?, 허영만 작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제 결혼에 가장 큰 반대를 하셨던 분은 장인어른이셨습니다. 소중한 막내딸에 대한 당신의 기대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사위를 거부하셨던 것이지요. 그때는 무척 서운했지만 자식을 낳아 기르는 지금은 그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장인어른의 반대가 계속 되면 단둘이 도망가 애라도 낳고 살자고 하면서 아내와 모의를 하던 어느 날 불현듯 결혼 승낙을 받았습니다. 결혼 승낙 후 가장 빠른 주말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후닥닥 식을 올렸습니다. 사람 마음이 언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결혼 전에 꼼꼼하게 따져봐야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면 내 자식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던 장인어른은 당신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호랑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꼬장꼬장하게 굴던 양반이 막내 사위인 저에겐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외손자, 외손녀들에게까지도 엄하셨던 분. 절대로 당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던 그분이 막내 사위에게는 손수 커피를 타주셨습니다. “한 서방, 커피 한 잔 할 거가?” 하시고는 늘 커피를 타오셨지요. 인스턴트커피 두 숟갈, 설탕 한 숟갈, 크림 두 숟갈의 커피는 내 입맛에 맞는 배합이 아니었는데도 어느덧 저는 그 맛에 익숙해졌습니다. 몸이 편하지 않으셨는데도 손수 커피를 타서 저에게 전해주시고는 제 곁에 앉아서 그 뜨거운 것을 훌훌 마셨습니다. 뜨거워서 입술도 대지 못하는 커피를 두세 모금에 훌쩍 마셔버리고는 잔을 내려놓으셨지요. 커피를 마시며 다정한 이야기 한 번 나눈 적 없습니다. 늙은 장인과 어린 막내사위가 나란히 앉아 마시던 인스턴트커피의 향기만 좁은 거실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치매 증상이 심해지던 장인어른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기억력의 퇴조였습니다. 명민하셨던 분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똑같은 질문을 아무리 여러 번 받아도 늘 처음처럼 대답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금방 마신 커피 잔이 채 식기도 전에 커피를 달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커피 한 잔으로는 부족하다며 커다란 대접에 한 가득 커피를 타서 드시던 장인어른은 어느 날 큰 병원에 입원하셨고 다시 퇴원하지 못하셨습니다.

아직도 그분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셨던 사위가 되지 못해 너무 죄송하다고 진심을 전하던 임종이 가까운 어느 저녁에 입술도 열지 못하신 채 따뜻한 눈빛으로만 응대하시던 그 병실 어디에선가 아련한 커피 향기를 맡은 것만 같습니다. 그것이 제가 추억하는 커피의 맛과 향기입니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기억은 커피 원두만큼이나 단단합니다. 그것은 도저히 잊을 수도 견뎌낼 수도 없을 것 같은 완고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기억이라는 원두들을 한 자리에 앉아 꼼꼼하게 고르고 골라서 정말 양질의 기억만을 선별합니다. 그것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인고의 불로 달구어 원두를 굽듯 구워냅니다. 시간의 힘은 단단하고 푸릇한 기억의 원두를 까만 커피콩처럼 푸근하고 따뜻하게 달구어냅니다. 그것을 다시 더운 가슴 속에서 갈아냅니다. 지나치게 거칠지 않고 균일한 알갱이가 되도록 서서히 오래도록 갈아야 합니다. 오랜 시간으로 굽고 따뜻한 가슴으로 갈아낸 기억의 커피가루는 현재라는 커피 잔에 담겨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주변을 맴돌아 우리들의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이렇게 오래 간직하고 선별하고 갈아내고 끓인 커피 같은 추억들을 편하게 마실 수 있을까요? 추억을 커피처럼 쉽게 마실 수 있다면 우리는 늘 새로운 기억의 원두를 갈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추억들을 그렇게 훌쩍 마셔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일상의 탁자 위에 놓인 채 오래오래 향기가 배어나오도록 가만히 놓아두어야 하는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추억이란 맛과 향기의 종류나 질과는 무관하게 매 순간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일상의 사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장인어른과의 추억을 훌쩍 마셔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런 연유는 아닐는지요.

만화 <커피 한 잔 할까요?>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와 맛볼 수 있는 커피는 정말 최고입니다. 허영만 선생님께서는 시대를 읽어내는 안목이 뛰어난 분이십니다. ‘맛집’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절에 이미 <식객>을 만드셨듯이 커피 전문점이 우후죽숙처럼 생겨나는 요즘에 커피를 소재로 한 만화를 기획하신 것은 탁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읽어내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능력의 탁월성 앞에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납니다. 게다가 섬세하고 꼼꼼하게 묘사하는 커피 제조 방법 등의 장면에 이르면 선생님의 치밀한 장인 정신을 대하는 경건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거북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이 탁월한 만화를 보고 나도 계속 미진한 느낌을 떨구지 못하는 것일까요? 커피와 얽힌 장인어른의 추억을 더듬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만화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치열한 현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골프가 대중화되었다고 해도 실제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인구는 전체 국민 숫자에 대비해 현저히 낮은 것이 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커피가 대중화되었다고 해도 커피를 만화에서처럼 온도와 색깔과 원산지 등을 고려해가면서 마실 수 있는 인구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좋은 산지의 원두만을 골라 고급스럽게 제조한 커피보다는 자판기에서 막 뽑은 커피나 봉지를 뜯어서 휘휘 저어 마실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를 마십니다. 굳이 <달콤한 제국 불쾌한 진실>이라는 만화가 그려내는 커피 산지의 고통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커피 한 잔 할까요?>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커피를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 우리 현실임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울리지 않게 막일꾼 생활을 잠시 한 적이 있습니다. 봉지 커피를 종이컵에 뜯어 넣고 뜨거운 물을 살짝 부어 녹인 후 찬물을 가득 채워 한입에 몽땅 털어 넣고는 노동 현장으로 서둘러 돌아가던 어떤 노동자의 뒷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에는 <야옹이와 흰둥이>의 야옹이가 자신의 시급보다 비싸다고 기겁을 했던 커피를 파는 전문점에서 아무 근심 없이 메뉴를 골라 주문하고 그것을 채 마시지도 않고 내버리는 사람들만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만화 내용 중에는 고급 커피가 아닌 자판기 커피의 맛을 잊지 못하는 외국인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커피가게 운영자가 자기 상점의 문마저 닫아버린 채 폐기 처분할 자판기를 직접 청소하고 그 내용물을 채워 많은 사람들에게 무료로 공급할 수 있을까요? 어떤 커피가게가 한 사람의 입맛만을 위해 커피를 개발하느라 그 사람을 인터뷰하고 그 사람을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까요? 이 험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입니다.

저는 간혹 커피전문점의 커피를 마시면서도 원산지를 묻고 빛깔이나 향기를 감상하기보다는 여전히 장인어른과 무언의 교감을 나누었던 인스턴트커피의 추억을 즐깁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마셔도 다 사라지지 않는 추억도 있으며 아무리 마시고 싶어도 더 마실 수 없는 현실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의 진짜 현실이 실감나게 녹아드는 만화를 읽고 싶은 마음을 안고 우리 모두 <커피 한 잔 할까요?>


한기호 문학박사  help@u-jew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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