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만화 평론] <인어공주>를 세 번 돌아보다

한기호 문학박사l승인2019.01.14l수정2019.01.14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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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어공주 (The Little Mermaid, 1989)

고백하자면 이 원고는 세 번째로 고쳐 쓰는 것이다.

제일 처음 쓴 원고에서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와 디즈니의 <인어공주>를 비교했다. 두 작품이 모두 주인공인 인어공주의 입사식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보았다. 주지하다시피 입사식이란 한 사람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벗어나 더 큰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치는 의례를 말한다. 졸업식이나 결혼식이나 성인식 등은 모두 입사식이다. 이 입사식은 ‘이전 사회와의 단절, 중간 단계의 시련, 새로운 사회로 재통합’이라는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바다 세계의 인어공주가 자신이 속한 세계와 결별하고(비늘을 버리는 것), 인어도 인간도 아닌 중간적 존재가 되어 고통 받다가(다리는 얻었지만 언어를 쓰지 못한다는 것은 시련이다.), 결국은 입사식에 실패하고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비극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입사식의 실패담을 그리고 있지만 디즈니의 경우는 그것을 성공담으로 탈바꿈했다는 차이점을 말했다. 그러면서 인어공주의 입사식이 비늘로 헤엄치는 바다를 벗어나 다리로 걷는 지상세계로의 진입이며, 이것은 주인공의 성적 주체성의 발견이라는 측면이 강조되는 성인식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식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어서 다시 쓰기로 했다.

두 번째 원고에서는 디즈니의 <인어공주>가 보여주는 성적인 이미지에 주목했다. 인어공주가 마녀의 흉계에 빠져 자신의 목소리를 담보로 삼아 지느러미로 된 자신의 하반신을 버리고 인간의 다리를 얻게 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것은 감각적이고 선정적인 화면으로 표현되고 있다. 지느러미를 버리고 다리를 얻는다는 것은 곧 인간의 성기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물고기로서의 하반신이 아니라 인간의 하반신으로 인간과 동일한 성적 접촉이 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인어공주가 성적 결정권을 가진 하나의 독립된 성인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인어공주의 아버지는 딸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오히려 딸을 억압하고 감시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부권으로 표상되는 권력과 억압, 그리고 합리적이지 못한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연약하지만 강인한 인어공주의 독립성과 주체적 의지에 주목하였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여전히 남성적 권위로 총칭할 수 있는 억압의 기제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인어공주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보로 잡힌 채 자칫 물거품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성적인 외피를 두르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독립된 자의식의 발로를 성적인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그 소재가 왜 하필 케케묵은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여야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다. 성적인 이미지의 표상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는 것으로 짝을 찾는 <신데렐라>도 노골적이며, 손가락을 물레 바늘에 찔려 피를 흘리는 것으로 상투적인 은유를 보여주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역시 이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인어공주>인가. 그래서 원고를 다시 쓰기로 했다.

세 번째로 쓰는 원고에서는 도대체 왜 지금 다른 만화도 아닌 디즈니의 오래 전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 집착하는가가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원고를 쓰기로 작정한 날은 공교롭게도 4월 16일 무렵이었다. 왜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들이 나를 들뜨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국민이라면 누구도 그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생명들이 온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앞에서 무기력하게 수장되어버린 그날. 그날로부터 일 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해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모두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언젠가부터 우리 국민들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의 상황에 빠져버렸다. 인어공주는 자신의 세계를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잃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진실은 세월 속에 묻힌 채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고 국민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들의 목소리를 빼앗겨버렸다. 국민의 목소리를 정직하게 대변해야할 언론들은 모두 권력의 대언자로 돌아서버렸다. 바다 밑 세계에 만족한 채 다른 세계는 도무지 꿈도 꾸지 말라고 억압하고 회유하는 인어공주의 아버지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무시무시한 권력의 지팡이를 휘두르며 온 국민들을 향해 ‘가만히 있으라’는 거대한 스피커의 방송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막강한 빨판을 자랑하는 거대한 문어로 그려지고 있는 마녀는 또 어떤가.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는 인어공주가 대적해야 할 마녀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빨판으로 국민의 피를 빨아들이며 끝없이 덩치를 키워가는 거대 자본이다. 자본의 힘이 생명의 가치를 흡혈하듯 빨아 마시는 세상에서 인간성을 온전하게 지켜내는 일이란 얼마나 힘에 겨운 일인가. 인성이란 단지 대학 신입생이나 대기업 신입 사원 선발 항목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요소일 뿐 현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로 사라져가고 있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다른 학생들을 구출한 의인들의 공적은 다른 나라에서는 기념할지 모르나 이 나라에서는 희미해지고 있으며, 유가족들과 그들을 향한 정상적인 슬픔의 공감대는 그들을 모욕하고 훼방하는 세력들에 의해 변질되어 갖은 오명을 뒤집어쓴 채 만신창이가 된 채 뒹굴고 있다.

왜 지금 디즈니의 <인어공주>인가? 비록 외모지상주의와 상투적인 해피엔딩이라는 단점을 가졌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입사의례라는 정상적인 구조가 있다. 부권으로 상징되는 공포와 억압 아래에서도 당당하게 저항하여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주장하고 획득하는 주체적 자아가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 얻어내는 사랑의 결실이 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마녀의 권력 앞에 끝까지 도전해서 쟁취하는 평화로운 결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이 세계는 그렇지 않다. 외모지상주의를 폄하하면서도 성형은 이미 정상이 되어버린 사회. 인간사회의 보편적 입사의례는 변질되어 이벤트로 전락해버린 사회. 권력의 억압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은 늘어가고 있으나 자신만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일은 곧 신변의 위협을 초래하는 사회. 자신의 목소리를 담보해서라도 쟁취하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그 목소리마저 빼앗기고 왜곡되는 사회. 자본이라는 마녀의 빨판에 질식되어 수없이 많은 인간성과 진실들이 영영 수장되어버리는 사회.

그러므로 우리는 안데르센의 물거품이 아닌 디즈니의 해피엔딩을 꿈꾸게 된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지금의 현실 속에서 실사판으로 재현되는 판타지를 꿈꾼다. 마녀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생명들이 세월을 거슬러 화려하게 부활하는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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