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만화 평론] 당신의 첫 만화 - <마루치 아라치>와 <은하철도 999> 이후 -

한기호 문학박사 / (현)입학사정관l승인2016.04.14l수정2016.04.1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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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마루치 아라치 (아래) 은하철도 999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는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셨습니다.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망해버리긴 했지만 그 가게를 운영하던 동안 유리창에 한 번씩 동네 극장 포스터가 붙곤 했지요. 그때마다 입장권도 공짜로 두 장씩 들어왔습니다. 그 공짜 표 덕분에 <잠자는 숲 속의 공주>나 <로보트 태권브이> 등의 만화영화를 극장에서 직접 보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만화영화 <마루치 아라치>는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악의 화신 ‘파란해골 13호’와 목소리만 카랑카랑한 ‘팔라팔라 사령관’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태권 영웅 ‘마루치’와 ‘아라치’의 이야기는 이미 라디오 드라마를 통해 익숙하게 들어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던 이야기를 커다란 극장 화면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는 기쁨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조금 과장을 하자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한 구약 성경 ‘욥’의 심정이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극장에서 본 세상은 너무나 넓고 아름답고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지요. 어려운 집안 형편에 ‘마루치’처럼 태권도를 배워 하늘을 날고 싶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던 어린 아이는 가슴 속에 영웅에 대한 환상들만 키우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를 대신해서 가게를 지키다가 과자 하나를 팔고 받은 백 원짜리 동전을 나도 모르게 윗도리 주머니에 넣고 찾아간 곳은 만화 가게였습니다. 동네 위쪽에는 밤마다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예쁜 누나들이 살았는데요. 그 누나들의 무료한 낮 시간을 책임지는 아주 작은 만화 가게가 하나 있었습니다. 짧은 반바지를 입고 늘씬한 다리를 훤히 드러낸 채 자유로운 자세로 방바닥에 앉아 만화를 보고 있는 멋진 누나들 사이에 끼어 앉아 무려 50원어치 만화를 빌려 허리 높이까지 쌓아놓고 막 첫 번째 만화책의 표지를 넘기려는 순간 뒤쫓아 온 어머니에게 잡혀 가서 해가 지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매를 때린 것에 대한 보상이었는지 아들의 욕구 해소를 위해서였는지 이튿날 어머니께서는 만화책을 한 자루나 빌려다 주셨습니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펼친 만화책의 제목은 지금 모두 잊어버렸지만 그 첫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커다란 로켓이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이었지요. 그 배경에 쓰인 구절은 ‘거대한 로케트가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였습니다. 그 날 이후로 만화책은 나에게 거대한 로켓과 같은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로켓들을 마음속으로 쏘아 올리며 이 힘든 세상을 견뎌내었는지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주제가와 함께 일요일 아침을 열어젖힌 만화는 <은하철도 999>였습니다. 비록 일요일 아침마다 가야 했던 교회 때문에 은하철도가 어둠을 헤치고 우주를 가르는 모습을 끝까지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이 더 크게 자리 잡기는 했지만 만화가 주는 상상력의 범위는 이제 태권 영웅이나 하늘을 향해 치솟는 거대한 로켓 수준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기꺼이 미지의 우주를 탐험하는 기묘한 열정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주인공 ‘철이’의 형편없는 외모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미모의 ‘메텔’이 주는 서양 여성의 환상은 가슴이 아릴 정도로 설레는 것이었습니다. 뛰어난 미모의 여성과 낯선 곳을 여행하는 환상을 그리는 남학생들은 많이 늘었겠지만 어느덧 우리는 우주를 달리는 증기기관차 형태의 기차를 만들 수는 없으며 우주를 나는 어떠한 형태의 날것이라도 그것에 올라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눈물지을 수는 없다는 상식적인 수준의 과학 지식을 갖게 되면서 마음속에 살아있던 낭만도 하나 둘씩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만화가 주는 영향력의 크기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들은 만화에 얽힌 저마다의 추억, 저마다의 교훈, 저마다의 감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만일 만화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런 처음의 추억조차 없는 생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은 얼마나 쓸쓸하고 황량할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만화와 같은 상상력이 있기에 꿋꿋하게 견뎌내고 있습니다. 이 행성에서 유일하게 상상력을 소유한 유기체로서 존재의 고독을 이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자본의 힘이 우리를 압도하는 급박한 지경에 처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만화처럼 이겨낼 수 있는 의지와 상상력을 보유한 강인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본 <마루치 아라치>가 색채도 형편없고 이야기 구성에 인과성도 없으며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이라서 어린 시절에 품었던 환상이 모두 깨져버렸다고는 해도 처음 느꼈던 그 기억은 오롯이 남아있습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본 <은하철도 999>가 사실은 성장기 소년의 억눌린 성욕을 적절히 완화시켜 그려놓은 음흉한 작품으로 읽힌다고 해도 어린 시절에 느꼈던 가슴 설레던 처음의 감정은 아직도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일찍이 김혜순 시인은 그의 시 <첫>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들어 있다. 첫처럼 매정한 것이 또 있을까.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첫이 끊고 달아난 당신의 입술 한 점.첫. 첫. 첫. 첫. 자판의 레일 위를 몸도 없이 혼자 달려가는 당신의 손목 두 개. 당신의 첫과 당신. 뿌연 달밤에 모가지가 두 개인 개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가며 찾고 있는 것. 잊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죽었다. 당신의 첫은 죽었다.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 김혜순, <첫>, 부분

시가 노래하고 있듯이 모든 처음은 결국 죽습니다. 우리가 처음 가졌던 추억, 우리가 처음 느꼈던 감정, 우리가 처음 맛본 환희, 우리가 처음 경험했던 일들. 그렇지만 그 처음은 아주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의 혈관 속에 여전히 남아서 맥박처럼 뛰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태권도가 본연의 정신을 잃어버렸든 아니든 우리가 처음 만난 <마루치 아라치>는 처음의 뜻처럼 여전히 견고하게 ‘마루’와 ‘아라’를 외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파란해골 13호’를 향해, 그 불의와 사악한 힘을 향해 결단의 발차기를 날릴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족을 모르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무분별하게 ‘은하철도 999’에 탑승한 채 어둠 속을 힘차게 달려간다고 해도 우리가 처음 만난 가슴 속 ‘철이’는 여전히 인간의 순수성을 포기하지 않고 ‘메텔’을 향한 순정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칼럼을 읽어주신 많은 독자 여러분, 당신의 ‘첫’ 만화는 무엇이었는지요? 당신의 ‘첫’ 상상, 당신의 ‘첫’ 순정, 당신의 ‘첫’ 정의, 당신의 ‘첫’ 모험, 당신의 ‘첫’ 순수, 당신의 ‘첫’ 추억은 무엇이었는지요? 아직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지요? 혹 그것들을 모두 잊어버렸다 해도 그 ‘처음’이 가졌던 아름다운 힘은 아직 피톨처럼 살아서 당신의 맥박 속에 함께 뛰고 있음을 느끼시는지요? 우리들 인류의 아름다운 상상력이 죽지 않는 한 만화 역시 우리와 더불어 살아서 뜀박질하며 우리와 호흡을 함께 할 것을 믿으며 다음을 기약합니다.

감사합니다.


한기호 문학박사 / (현)입학사정관  help@u-jew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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